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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버렸던 것들이 기어올라오는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쓰레기통에 버려둔 쓰레기에서 올라오는 악취, 잡아서 버린 줄 알았던 벌레, 그리곤 어딘가에 버려두고 기억하지 못하다가 한 번씩 치고 올라오는 우리의 자존심.

 

우리는 20대에 세상에 던져지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또 많은 것들을 얻는다.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버린다. 그 세상에 내던져짐과 동시에, ‘이기를 포기한다.

 

이기를 포기한 우리에게는 주어지는 것이 있다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이다. 때로는 학교에서 세상이 이런 곳이라는 것을 한 번쯤은 몸소 체험하게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랬더라면 학교에서 품게 했던 희망을 조금 미리 내려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나를 잃어간다.

 

평상시에는 나를 잃어가는 나인지, 세상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는 나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가 알게 모르게 형성시켜왔던 신념이 짓밟힐 때, 그것이 등장한다. 그것마저 놓아버리면, 그것마저 눈 감고 지나쳐버리면 진정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서, 진정으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서.

 

그렇게 어딘가 버려두었던 자존심이 깨어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자존심에 대한 긍정, 또는 부정.

 

자존심에 대한 긍정은 그 일에 대한 부정을 동반한다. 반대로 자존심에 대한 부정은 그 일에 대한 긍정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자존심이라는 감정과 단둘이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언제 어딘가에서 잠시 접어 버려두었는지 모를 그 감정은 나 자신을 인지하게 해 준다. 흐르는 시간에 풍류에 맡겨 두었던 나의 삶을, 잠시 정박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곤 결정한다. 지금까지 흘러왔던 것과 같이 흐르는 풍류에 몸을 맡기며 나아갈지, 아니면 그것만은 절대 용납을 할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릴지.

 

전자를 선택한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고 잠시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정박시켰던 그 배 위에 올라타 더 강한 자신이 되리라는 다짐과 함께 더 거친 세상으로 흘러갈 것이다.

 

후자를 택한 사람은 배를 조금은 거 견고히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지금까지의 항해를 끝으로 그 배라는 세상에서 몸을 꺼내 다른 세상으로의 항해를 시작할 수도 있다.

 

어떠한 선택이 옳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영혼까지 팔아가며 살아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초라한 내게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테니까.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자존심, 김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