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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목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가 차오르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습관처럼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묻는다.

 

오늘 힘들지는 않았어?”

 

그때 말한 그건 조금 괜찮아졌어?”

 

목 끝까지 차오른 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또 누군가 너무도 버거워 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럴 때면 우리는 목 끝까지 차올랐던 이야기들을 뒤로 한 채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어 들어준다.

 

우리 자신의 아픔을 뒤로한 채 말이다.

 

안부를 물을 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희생한다. 그리고 그 희생은 목 끝까지 차오른 우리네 이야기를 잠시 머금게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 안에 담는다.

 

털어놓기도 바쁜 순간에 우리는 그 이야기들까지 흡수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그거 들어주는 게 뭐 힘들다고.”

 

하지만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특히 자신의 이야기 목 끝까지 역류해 올라온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함해 그 이야기들까지 눌러 담는 것 자체가 큰 아픔이자 큰 버거움이다.

 

물이 새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물이 새는 그 구멍이 새지 않게 하루 종일 혼자 막고 있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무엇으로 막든 하루 종일 그 구멍에서 물이 새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혼자 물을 막기 위해 온몸을 다 쓰며 물을 막아내고 있는데, 누군가 조용히 오더니 옆에 나란히 선다.

 

물을 막고 있던 이는 생각할 것이다.

 

지금 내가 이런 상황인 것을 보았을 테니 같이 물을 막아 주겠지?”

 

그런데 되려 다가온 이는 물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물은 흘러야 하는 것이라면 구멍을 더 뚫어놓고는 이내 자기의 할 일을 마치고 떠나버린다.

 

그것이 자신의 일도 아닌 홀로 남은 그는 누군가 남기고 간 구멍까지 막으며, 그 버거움으로 젖어간다.

 

어쩌면 안부라고 하는 인사 자체가 우리의 희생을 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의 이야기를 뒤로한 채 다른 이의 이야기를 담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일상을 지나며 평범한 안부들이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은 상황들에서 그것을 물어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어쩌면 자신보다도 그 대상을 더 생각하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묻는다

괜찮지 않은 나를 뒤로한 채

안부, 김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