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이렇게 이야기한다.
“절실함의 정도가 성공의 여부를 좌우한다.”
아마 절실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절실함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진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 대표 축구 선수로 선출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예산이 부족했는지 축구 유니폼을 주전들에게만 지급했다. 아니 어쩌면 돌려 입는 유니폼이었기에 주전들이 입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유니폼 관리는 당연히 주전들이 했다.
때는 시합 도중이었다. 전반전이 채 중반을 흘러가기도 전에 감독님은 선수 한 명을 불러들였다. 교체 사인이었다. 그 주전이 경기 당일 폼이 너무도 떨어졌던 까닭이다. 감독님은 나를 준비시켰다.
당연히 여벌 옷이 한 벌도 없었던 당시 상황으로선 미리 몸만 풀고 있다가 선수가 교체되어 들어오면 그 옷을 재빨리 입고 운동장으로 나가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선수가 교체되어 들어오고, 나는 출전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주전 선수가 입고 있던 유니폼 상의를 받는 순간, 코를 감싸 쥐었다. 참을 수 없는 악취가 유니폼에서 나는 것이었다. 그는 분명 전반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들어온 선수였다.
그 냄새는 그간 쌓여왔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는 없었다. 나는 옷을 입지 않고 심판에게 물었다.
“그냥 다른 옷 입고 뛰면 안 되나요?”
돌아온 답은 이러했다.
“규정상 같은 유니폼을 입어야 합니다.”
그 말은 들은 나는 감독님께 생각을 전했다.
“감독님 유니폼에서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못 입겠습니다.”
그러자 감독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들어가.”
나는 헷갈렸다. 그라운드로 들어가라는 것인지, 벤치로 들어가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알 수 있었다.
감독님은 다른 선수를 준비시켰다. 그리곤 내게 말씀하셨다.
“유니폼 저 친구 줘.”
나는 하는 수 없이 유니폼을 건넸다. 참을 수 없는 악취. 차마 들고 있기도 힘들었던 유니폼이었다. 그 유니폼을 받은 친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경기를 뛰었다.
후의 나는 단 한 경기도 뛸 수 없었다. 모든 경기를 벤치에서 관전할 수밖에는 없었다. 반면 악취가 가득했던 유니폼을 받아들고 경기에 나섰던 그 친구는 자신의 기량을 그 경기 동안 마음껏 펼쳐 보였고, 폼이 올라오지 않던 주전 선수와 엎치락뒤치락하는 기량 경쟁 끝에 그 자리를 쟁취해냈다.
폼이 떨어졌던 그 주전 선수도 더 이상은 뛸 수 없었다.
나는 그때의 일을 돌아보며 느꼈다.
“절실함의 차이였구나...”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절실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 유니폼을 다른 이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런 내가 있는 반면 그 유니폼을 받아들고도 그라운드로 향한 이가 있다. 그는 그리도 절실했다. 온갖 악취가 나는 그 유니폼을 입고도, 헐떡이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냄새가 코를 찌르고 폐를 채워도, 그는 그것을 입고 그라운드를 뛰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물론 내가 뛰었어도 그 친구만큼의 성공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감독님의 입에선 내 이름이 먼저 나왔다는 것이 내 선택을 아쉽게 하는 부분이었다.
이렇듯 비슷한 위치에 있던 두 명의 사람도 절실함의 차이에 따라 극과 극으로 위치가 변화한다. 냄새를 감당치 못할 정도의 절실함을 가진 사람은 그 자리를 지켰고, 그것을 감당해 낸 사람은 높은 위치에 올라섰다.
우리에겐 언제 절실함이 필요한 상황이 다가올지 모른다. 우리에게 절실해야만 하는 상황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우리가 처음 가졌던 절실함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일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우리는 우리가 처음 가졌던 절실함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일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절실함, 김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