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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하지만 과거가 되어버리고 마는 현재를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놓지 못한다. 그것이 앞을 바라보면서도 뒤를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친한 이들 몇몇이 모이면 나누는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지난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학창 시절에 대한 이야기, 그들이 공유했던 과거의 추억들에 대한 이야기, 그들이 흩어져 살아왔던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이야기. 그 과거의 이야기들이 모여 밥상을, 또 때로는 술상을 이룬다.

 

이것은 꽤나 괜찮은 추억으로 남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과거가 때로는 설명이 필요한 때가 있다.

 

이 설명이 필요한 대표적인 질문이 이것이다.

 

“너 그때 왜 그랬어?”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

 

다시 한번 고민을 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고민을 마친 후의 반응은 대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이제는 어렴풋해진 그 과거를 모두 설명하려 하거나, 또 하나는 그 어렴풋한 과거를 향유하는 듯한 은은한 미소로 그 상황을 넘겨버린다.

 

나는 후자인 존재가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그 상황에 대해서는 처음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상황에 투박하고, 완전치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상황에 최선을 다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최선의 선택들이 자아내는 결과를 우리는 향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거를 즐기지 못한다면 어떤 기억으로 남은 날들을 살아가겠는가.

 

많은 말로 그 상황들을 모두 설명해내려는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또 자신의 행동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반면 자신의 과거를 향유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삶보다 즐기며 사는 삶이 더 가치를 더하지 않겠는가.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과거에 연연하지 마라.”

 

분명 맞는 말이다. 이 말과 같이 우리는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묶이는 순간 우리는 과거를 현재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지난날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 지난날을 설명하려 든다.

아쉬움일까 미련함일까

어제, 김경민